안녕하세요!
오늘은 30년 전쟁의 마지막에 대해 재미있게 이야기해 보려고 해요.
독일의 혼란스러운 시기와 주요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결단과 전략에 대해 알아보죠.
발렌슈타인의 딜레마
발렌슈타인은 슈트랄준트를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영지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어요.
2차 전쟁이 끝난 후 3차 전쟁까지 시간이 너무 짧아서 전후 복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페르디난트 2세가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2세를 막기 위해 소집령을 내렸지만,
발렌슈타인은 군대를 보내지 않았어요.
준비가 더 필요했거든요.
바이에른 영주의 반역
그 와중에 더 큰 문제가 발생했는데,
팔츠 선제후이자, 바이에른 영주 비텔스바흐가 황제의 소집령을 거부하고 프랑스의 돈을 받았어요.
비텔스바흐는 리슐리외의 제안에 따라 황제 자리를 넘보게 되면서, 페르디난트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답니다.
이건 실제로 반역 행위였고, 독일 내에서 큰 충격을 주었죠.
한편, 마그데부르크는 자유시로서 신교와 구교를 모두 포용하면서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중립 입장을 고수했어요.
마그데부르크는 신교에 가까운 지역이었지만, 종교적 갈등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중립을 지킨 것이었답니다.
이런 중립 선언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나름대로의 생존 전략이었어요.
틸리 백작의 마그데부르크 점령
틸리 백작은 전통적인 명망있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자 황제파였어요.
그는 1차, 2차 전쟁에서도 활약했지만, 인기는 발렌슈타인이 다 가져갔답니다.
잘생긴 외모와 카리스마 때문이었죠.
틸리 백작은 마그데부르크를 점령하여 신교도들에게 큰 타격을 입히려 했어요.
그러나 그는 마그데부르크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병사들이 도시를 불태우고 약탈, 성폭행, 학살을 저질렀어요.
사건은 신교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우리가 반역자가 되면서까지 황제와 싸워야 하나?"라고
고민하던 신교도들이 "이러다 우리 다 죽겠다. 어쩔 수 없이 싸우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이는 3차 전쟁의 시작을 촉발했어요.
틸리 백작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마그데부르크 학살 사건으로 인해
명망있는 귀족 가문의 명예가 크게 추락했어요.
이 사건 이후로 그는 점점 소극적으로 움직이며 몸을 사리게 되었답니다.
전쟁의 시작: 미국 남북전쟁의 게티스버그 전투와의 유사점
마그데부르크에서의 전투는 미국 남북전쟁의 게티스버그 전투와 유사한 측면이 있어요.
두 전투 모두, 서로 싸우려는 의도 없이 정찰 중 우연히 마주쳐서 대규모 전투로 이어졌답니다.
게티스버그 전투는 남북전쟁 중 가장 큰 전투 중 하나로,
북군과 남군이 게티스버그 고지대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시작되었어요.
이 전투는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북군의 승리로 끝났죠.
마그데부르크 전투에서도 비슷하게, 신교도와 구교도 간의 갈등이 우연히 큰 전투로 이어졌답니다.
틸리 백작의 공격은 신교도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는 3차 전쟁의 서막을 열었어요.
구스타프 아돌프와 전투와 틸리 백작의 패배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대는 신교도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30년 전쟁에 참가했어요.
그는 영국의 리처드 1세의 별명에 따라 스웨덴의 사자왕이라고 불리는 왕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발트해 진출을 100년을 미룰 정도로 러시아를 몰아내는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지금은 근대전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습니다.
이런 왕을 맞아 전투를 치러야 하는 틸리 백작의 소극적인 태도 속에서,
구스타프 아돌프의 정찰대와의 작은 충돌이 큰 전투로 이어졌어요.
고지대에서 정찰병들끼리 소규모 전투가 시작되었고, 점점 더 많은 부대들이 이 싸움에 끼어들게 되었답니다.
정찰병들 간의 충돌이 본격적인 대규모 전투로 확대되면서, 틸리 백작의 본대도 이 싸움에 합류하게 되었어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구스타프 아돌프 왕도 전장에 도착했어요.
작은 충돌이 큰 전투로 변모한 이 상황에서,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대와 틸리 백작의 군대가 맞붙게 되었답니다.
이 전투에서, 틸리 백작은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대에게 패배했어요.
이 전투는 구스타프 아돌프의 전략적 우위와 전투력의 증명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었답니다.
틸리 백작의 패배는 신교도들에게 큰 사기를 북돋아주었고, 30년 전쟁에서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어요.
테르시오 전법과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사 혁신
테르시오 전법은 스페인의 카톨릭 군대가 자주 사용한 보병 전술로,
창병들이 사각형의 진을 형성하고 긴 창을 들고 있는 전술이에요.
이 전술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스페인은 이를 통해 많은 식민지를 확보할 수 있었답니다.
틸리 백작도 이 전술을 매우 잘 활용했어요.
구스타프 아돌프는 테르시오 전법을 깨뜨리기 위해 혁신적인 군사 전술을 도입했어요.
그는 일렬로 줄을 선 머스킷 병들이 제식을 갖춰서 일제 사격을 하는 방식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답니다.
머스킷 병의 일제 사격은 단순히 총을 쏘는 것이 아니라, 군사 훈련을 통해 정밀하게 조준하고 일제히 사격을 가하는 전술이에요.
이는 적의 진형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력한 화력 지원을 제공했답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머스킷 병의 일제 사격을 통해 테르시오 전법을 깨부쉈어요.
1620~40년대의 유럽에서는 구스타프 아돌프의 혁신적인 전술이 도입되기 전까지 총을 사용하는 방식이 체계적이지 않았어요.
총병들은 적당히 알아서 총을 쏘는 방식이었고, 기술력도 아직 발달되지 않았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조총병들은 조선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이는 당시 일본이 조총을 대량으로 사용하여 적을 제압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에요.
유럽에서는 머스킷 병의 일제 사격이 체계화되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구스타프 아돌프의 전술 혁신이 이를 가능하게 했어요.
구스타프 아돌프는 체계화된 머스킷 병의 일제 사격과 함께 기병과 포병의 협동 작전을 도입하여 테르시오 전법을 무너뜨렸어요.
그의 군대는 보다 기동성이 뛰어나고 화력 지원이 강력하여, 틸리 백작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답니다.
이는 30년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어요.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사 혁신과 플린트락 시스템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사 혁신은 전 유럽에 큰 충격을 주었어요.
그의 머스킷 전열병이 무적 전술로 여겨지던 테르시오 전법을 깨부쉈답니다.
이 혁신의 핵심은 새로운 총기 시스템인 플린트락(Flintlock) 시스템이었어요.
과거 매치락 시스템은 심지에 불을 붙여서 화약을 점화하는 방식이에요. 이 시스템은 다음과 같은 단점이 있었어요.
매치락
- 습기와 비: 습한 날씨나 비오는 날에는 심지에 불을 붙이는 것이 어려워, 총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어요.
- 연사력: 심지에 불을 붙여야 하기 때문에 연사력이 떨어졌어요.
플린트락 시스템은 부싯돌을 사용하여 마찰로 불을 붙이는 방식이에요.
라이터에 불을 붙이는 것과 유사한 원리로,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었어요.
클린트락
1. 습기와 비: 어느 정도 습기와 비에도 불을 붙일 수 있어, 총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이 더 넓어졌어요.
2. 연사력: 마찰로 불을 붙이는 방식이기 때문에 연사력이 뛰어났어요.
구스타프 아돌프는 플린트락 시스템을 도입하여 스웨덴 군대를 혁신했어요.
이로 인해, 스웨덴 군대는 기존의 매치락 시스템을 사용하는 군대에 비해 월등한 화력을 발휘할 수 있었답니다.
이 시기부터 유럽에서는 여군을 창설할 것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총의 사용이 그만큼 쉬워졌다는 것을 의미하죠.
국가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어 병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총병을 쉽게 훈련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요.
이는 국가가 점점 더 어려워져 가는 과정의 하나일 수 있답니다.
조선 효종(1649~1659) 시대에도 조총의 위력과 활보다 다루기 쉽다는 점을 이유로 여군 창설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북유럽의 사자왕'이라 불릴 만큼 용맹했어요.
그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병사들을 이끌었답니다.
그의 용맹과 혁신적인 군사 전술은 스웨덴 군대를 강력하게 만들었어요.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사 혁신은 30년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중요한 순간이었어요.
플린트락 시스템의 도입과 효율적인 전술은 기존의 테르시오 전법을 무력화하고,
새로운 군사 전략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답니다.
이는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이후 전쟁의 양상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어요.
전쟁의 복잡성과 정치적 갈등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과 비텔스바흐의 소집령 거부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어요.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전쟁으로 인한 혼란은 독일 내의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답니다.
리슐리외의 전략적 개입과 바이에른 영주 반역은 독일의 통일 시도를 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틸리 백작의 죽음과 발렌슈타인의 딜레마
틸리 백작은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결국 사망하게 돼요.
이는 페르디난트 2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제 그는 발렌슈타인에게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답니다.
발렌슈타인은 돈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었지만,
당시 독일의 혼란스러운 상황 또한 그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어요.
그는 주변 귀족들에게도 미움을 샀고, 페르디난트에게도 신뢰를 받지 못했답니다.
발렌슈타인은 사실상 반쪽짜리 영주였으며,
세금 결정 권한 등 중요한 권한을 제대로 받지 못해 전쟁 준비에 한계가 있었어요.
발렌슈타인은 여러 면에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어요.
그는 이미 페르디난트와 귀족들 사이에서 미움을 사고 있었고,
전쟁에 나가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반역자로 몰릴 위험이 있었답니다.
전쟁에서 이겨도 이미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그의 운명은 어두웠어요.
발렌슈타인의 전략과 구스타프 아돌프의 기습
발렌슈타인은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대보다 병력이 많았고,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어요.
하지만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대는 왕이 직접 이끄는 군대였으며,
신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발렌슈타인은 자신이 불리하다고 느꼈답니다.
발렌슈타인은 여론전을 통해 독일 내 신교도들에게 구스타프가 침략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어요.
구스타프의 보급을 더 어렵게 만들었답니다.
이는 사마의가 제갈량을 상대로 시간을 끌며 전면전을 피한 전략과 유사해요.
추운 겨울, 구스타프 아돌프의 군대와 발렌슈타인의 군대는 대치하게 되었어요.
일반적으로 군대는 겨울에 전쟁을 하지 않지만,
이 상황에서 발렌슈타인의 보급 부대가 구스타프의 정찰병에게 발견되었답니다.
기병들은 후방으로 빠져 있어, 발렌슈타인의 군대는 불리한 상황에 놓였어요.
구스타프 아돌프는 기습의 기회를 잡고 공격을 명령했어요.
발렌슈타인은 기병이 후방에서 도착할 때까지 보병 부대로 방어를 유지하는 전략을 세웠답니다.
이는 망치와 모루 전술처럼, 보병이 구스타프의 군대를 묶어두고 기병이 후방을 치는 계획이었어요.
뤼첸 전투: 유럽의 관도대전 30년 전쟁의 절정
이 전투는 삼국지의 적벽대전과 유사하게, 30년 전쟁의 중요한 절정이었어요.
두 군대가 우연히 맞닥뜨린 이 전투에서, 순간적인 판단력과 전략이 승패를 가름했답니다.
구스타프 아돌프는 기병이 빠진 발렌슈타인의 보급 부대를 기습하여, 발렌슈타인의 군대를 혼란에 빠뜨렸어요.
발렌슈타인은 보병 부대를 방어적으로 운용하여 시간을 끌며 기병의 도착을 기다렸답니다.
여러분, 매매에서도 순간적인 판단력과 전략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죠?
적벽대전이나 30년 전쟁의 중요한 전투들처럼, 매매에서도 한 순간의 판단이 전체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그러니 꾸준히 공부하고, 다양한 상황을 경험하며 판단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답니다.
뤼첸 전투와 30년 전쟁의 결정적 순간
이 전투는 정말 복잡하고,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어요.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 각 세력의 배경과 주요 사건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할게요.
구스타프 아돌프가 전사한 사실을 스웨덴 군대는 전투 중에는 알지 못했어요.
그들은 계속해서 싸웠고, 발렌슈타인도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퇴각을 결정했답니다.
스웨덴 군대는 왕의 죽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전투 매뉴얼대로 포메른으로 퇴각을 잘 마무리했어요.
발렌슈타인의 군대도 많은 지휘관들이 죽어나갔어요.
특히 독일 내의 경험 많은 지휘관들이 거의 다 죽어서 독일은 초토화 상태가 되었죠.
이 와중에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교묘하게 이간질을 시작했어요.
그는 살아남은 지휘관들을 반역자로 몰아가며 다른 지휘관들이 다 죽었는데 너희는 왜 살아남았냐고 의심을 부추겼답니다.
이 상황을 보고 황제측은 살아남은 지휘관들에게 "너는 왜 살았냐?"라며 트집을 잡았어요.
특히 스페인은 이에 대해 엄청나게 항의했답니다.
스웨덴은 신교도 해방을 목표로 했지만, 사실 유럽 대륙에서 땅을 차지하는 것도 큰 목표였어요.
구스타프 아돌프가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은 전투에서 승리하며 유럽 본토에 땅을 차지하게 되었답니다.
이 땅은 30년 전쟁 이후 한참 동안 스웨덴의 소유로 남아있다가 나중에 프로이센에게 넘어갔어요.
놀랍게도 이런 이간질이 먹혀들어가면서 발렌슈타인을 포함한 살아남은 지휘관들은 징계를 받게 되었어요.
페르디난트와 발렌슈타인의 마지막
이후 황제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에게 다음 명령서를 전달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 명령서를 전달하는 신하가 발렌슈타인의 옆 막사에 프랑스 사신이 있는 것을 보고 큰 의심을 하게 되었죠.
이것 또한 리슐리외의 계략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발렌슈타인은 배신자로 몰리게 되었고,
결국 도망가다가 영국 용병대에게 죽음을 맞이하게 돼요.
4차 30년 전쟁: 리슐리외의 놀이터
30년 전쟁의 4차 전쟁은 정말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였어요.
이 시기는 독일 땅에서 수많은 국가들이 전쟁을 벌이던 시기로,
리슐리외 추기경의 이간질과 음모가 큰 역할을 했답니다.
이번에도 그의 교묘한 전략 덕분에 프랑스는 크게 군대를 쓰지 않고도 독일을 망가뜨릴 수 있었어요.
독일은 이미 유능한 지휘관들이 많이 죽은 상태였고,
그로 인해 외국 군대가 독일 땅에 들어와 전쟁을 벌이는데도 막지 못했어요.
독일 내에서 통제력이 약해진 상황은 외국 군대들이 마음대로 싸우게 만들었고,
이는 독일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죠.
그런 상황에서도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난도 데 오스트리아 왕자가
4차 전쟁에서 신교도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페르난도는 스페인 펠리페 3세의 아들로, 계승 2위에 있던 왕자였어요.
그의 승리로 인해 신교도군은 큰 타격을 입게 됐어요.
하지만, 여기서 프랑스가 참전하게 됩니다.
리슐리외는 신교도가 패배하고 구교도가 독일을 통일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는 프랑스가 직접 전쟁에 개입하게 만들었답니다.
페르난도가 신교도군을 이기고 나자,
프랑스는 "아니, 페르난도 왕자는 가서 도움만 주라고 했더니 왜 싸워서 이기고 난리야!"라며 개입을 결정하게 됩니다.
리슐리외는 정말 교묘하게 상황을 조종했어요.
그의 이간질과 음모는 독일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프랑스는 군대를 크게 동원하지 않고도 독일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어요.
그의 전략 덕분에 독일은 외국 군대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독일 내부의 혼란은 계속해서 심화되었답니다.
4차 전쟁의 특성과 유럽의 참여
4차 전쟁은 많은 나라들이 참여한 대규모 전쟁이었어요.
폴란드, 러시아, 오스만투르크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이 전쟁에 발을 담그게 되었답니다.
덴마크도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지만, 4차 전쟁쯤 되면 페르난도의 협상으로 참전하게 돼요.
전쟁 자체는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도 4차 전쟁이었답니다.
이는 수많은 나라들이 참여한 것과 관련이 있어요.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고지전 같은 형태로 전개되었고,
어느 한쪽이 확실하게 우위를 차지하지는 못했답니다.
하지만 이는 리슐리외의 목적이었어요.
그는 전쟁을 길게 끌어서 독일을 초토화시키고, 유럽 국가들을 약화시키려 했답니다.
30년 전쟁의 의의
30년 전쟁은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한 사건이었어요. 이 전쟁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답니다.
- 신교도들의 승리: 신교도들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유럽 내에서 그들의 입지를 확고히 했어요.
신교도의 승리는 종교적 다원주의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답니다.
2. 카톨릭 세력의 몰락: 이 전쟁으로 인해 카톨릭 세력은 큰 타격을 입고 몰락하게 되었어요.
카톨릭 교회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고, 이는 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답니다.
3. 종교 자유화 분위기: 전쟁 이후 유럽 땅에서는 종교 자유화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어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종교적 관용과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이는 유럽 사회의 중요한 변화로 이어졌답니다.
리슐리외의 명성, 역할과 영향력
30년 전쟁으로 인해 리슐리외는 유럽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이 되었어요.
그는 추기경이면서도 정치적 음모와 외교적 전략을 통해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유지하려 했답니다.
그의 교묘한 음모와 전략 덕분에 프랑스는 유럽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어요.
게임이나 소설에서도 리슐리외는 종종 음모를 꾸미는 악역으로 묘사되곤 해요.
리슐리외 추기경은 이 모든 변화 속에서 독보적인 인물로 떠올랐어요.
놀랍게도 그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파문당하지 않고,
오히려 프랑스를 유럽의 최강국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답니다.
리슐리외의 교묘한 외교와 전략 덕분에 프랑스는 명실상부 유럽의 최강국이 되었어요.
이전에는 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이 이후로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을 쥐게 되었답니다.
영국이 1700년대 중후반에 식민지 정책을 통해 대영제국이 되기 전까지 모든 유럽은 프랑스의 눈치를 보게 되었어요.
영국의 내전과 리슐리외
이 시기에 영국은 내전이 터졌어요.
찰스 1세의 통치 하에 영국 내전이 일어나면서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이하게 되죠.
재미있는 점은, 리슐리외가 영국 내전에도 관여했을 거라는 괴담이 유럽 전역에 퍼졌다는 것이에요.
이 이야기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서도 묘사되곤 합니다.
물론 이는 소설 속 이야기이고 실제 사실은 아니지만,
리슐리외가 그만큼 유럽 전역에서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랍니다.
30년 전쟁은 독일을 몰락시키고 프랑스를 유럽의 최강국으로 만들었어요.
이 전쟁의 결과로 인해 독일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었고,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을 쥐게 되었답니다.
이로 인해 두 나라 사이의 긴장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현대의 유럽 정치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어요.
리슐리외의 전략과 외교는 프랑스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지만,
독일과의 긴장 관계를 유발하며 유럽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기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가 이후 세계 1차 대전으로까지 발전하는 시작이 됩니다.
이번 글도 챗지피티를 엄청나게 교육(갈굼 아님)하고 또하고 해서
조금 더 괜찮은 정리가 된것 같기도 합니다.
그림도 뭔가 조금 더 괜찮은 것 같지만 사람을 동물로 묘사해서 학습 시키면
그 다음부터 동물로 그려버리는 바보라는걸 알았습니다.
그림 학습은 정말 오래 걸릴듯하고 그림체 학습을 제대로 못합니다.
계속 그리게 시켜서 그려낸 그림을 저장해서 이 그림체 기억하라고 하면 기억하는 척하지만
몇번 더 요구하면 그림체 다 잊어버리더라구요.
제가 못하는 걸수도 있어요!
나름 재미있긴 한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걸리는데
어쩌면 노트북의 성능이 나빠서 일수도 있는데
4090 그래픽 카드로 학습시키면 더 잘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식으로 책지피티 교육시키며 사용법을 더 연구해볼께요!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럽의 삼국지 : 독일 30년전쟁2(용병왕과 북방의사자 그리고 루즈재상 리슐리외) (4) | 2024.07.23 |
---|---|
유럽의 삼국지 : 독일 30년전쟁1(종교 갈등의 시작과 영웅들의 등장) (1) | 2024.07.21 |
일본 전국시대부터 임진왜란과 통일까지 (0) | 2024.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