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유럽의 삼국지 : 독일 30년전쟁1(종교 갈등의 시작과 영웅들의 등장)

2024. 7. 21.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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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방송했었던 독일의 30년 전쟁을 이번에도 chatGPT로 정리 요약해봤습니다.

유럽에서는 세계 최초의 세계대전 성격을 띄는 전쟁이었다고 하며

30년 전쟁 이후 유럽의 세력구도와 민족정서와 함께 이후 정치적인 갈등이 현대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기에

현대 유럽을 이해하려면 중세시대는 건너뛰어도 30년전쟁부터는 잘 알고 있으면

유럽에 대해 이해하기 좋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유럽의 삼국지라고 생각하며 관련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었어요.

삼국지처럼 정말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인물 몇명만을 언급하면서

극적인 부분만 설명을 하겠지만

동아시아 정서와 유럽의 정서는 매우 다른 부분이 많기 때문에

그 부분도 자세하게 설명할거예요.

gpt가 요약을 하긴 했지만 중복되는 내용이 곳곳에 있어서 그 부분은 삭제했음에도

여전히 남아있을 수가 있어요.

역시나 정사라고 생각은 하지만 기껏해야 제가 책으로 보고 인터넷으로 뒤져보는 정도의 지식이라

전문성은 없으니 그냥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만 보시면 돼요.

30년 전쟁을 시작으로 방송에서는 세계 2차대전까지 할 생각인데

과연 할 수 있을지!!

천천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되겠죠.

오늘은 그 1편의 내용을 올려봅니다.

chat GPT가 유료를 사용하는데도 뭔가 제한이 걸려있어서 24시간 사용할 수가 없네요.

하다보면 저도 점점 익숙해 지겠죠!

방송으로 보시면 더 자세하면서도 이런, 저런 농담과 음모와 도파민 듬뿍담은 맛간 역사이야기도 보실 수 있습니다~


유럽 역사에서 중세의 끝: 1453년

유럽 역사에서 중세의 끝을 1453년으로 보는 이유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이 해를 기점으로 중세가 막을 내리고 근세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1. 비잔틴 제국의 멸망: 1453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면서 비잔틴 제국이 멸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동로마 제국의 1,000년 역사의 끝을 의미하며, 유럽과 중동의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2. 백년전쟁의 종결: 같은 해,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이 끝났습니다. 이 전쟁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이어졌으며,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 전쟁의 종결은 두 나라의 정치적 안정과 근대 국가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아비뇽 유수와 중세의 끝

교과서에서는 중세의 끝을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로 보기도 합니다.

아비뇽 유수는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로마 교황청이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갔던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 기간 동안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한 교황이 아비뇽에 머물렀고,

이는 로마 교황청의 권위에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서로 다른 두 교황이 동시에 존재했던 대립 교황 시대(Great Schism)가 이어졌습니다.

  1. 아비뇽 유수: 로마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이전하면서 로마의 권위가 약화되고, 프랑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었습니다.
  2. 대립 교황 시대: 1378년부터 1417년까지 두 명의 교황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교황직을 주장하면서, 유럽은 교회 권위의 분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근세의 정의와 기간

1400년대 중반부터 1600년대 중반까지의 기간을 '근세'(Early Modern Period)라고 부릅니다.

근세는 중세와 근대 사이의 시기를 의미하며, 유럽에서의 중요한 변화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근세의 시작: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백년전쟁의 종결
  • 근세의 주요 사건들: 르네상스, 종교 개혁, 대항해 시대, 그리고 30년 전쟁(1618-1648)
  • 근세의 끝: 30년 전쟁의 종결로 여겨지며, 이 전쟁은 유럽의 정치 지형과 종교적 균형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근대의 정의와 기간

근세 이후의 시기를 근대(Modern Period)라고 하며, 이 시기의 끝은 다음과 같은 사건들로 정의됩니다.

  1. 미국 독립 전쟁: 1775-1783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근대의 주요 사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2. 나폴레옹 전쟁: 1799-1815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유럽 대부분을 정복하며 정치적 지형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3. 산업 혁명: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은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이와 같이, 유럽 역사는 중세에서 근세로, 근세에서 근대로 이어지며 중요한 사건들을 통해 변화해왔습니다.

각 시기의 주요 사건들과 그 의미를 이해하면, 유럽 역사의 흐름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 프랑수아 2세

프랑수아 2세는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그가 재위하던 시기(1559-1560)는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전쟁이 치열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프랑수아 2세의 아내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였어요.

이로 인해 프랑스와 스코틀랜드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1세

메리 스튜어트의 존재는 당시 잉글랜드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큰 정치적 위협이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고, 그녀의 치세 동안 잉글랜드는 많은 정치적, 군사적 갈등을 겪었습니다.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인 제임스 1세는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로 지정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의 왕위는 튜더 왕조에서 스튜어트 왕조로 넘어가게 되죠.

윈저 왕조와 30년 전쟁

현재의 영국 왕조인 윈저 왕조는 20세기 초에 등장했지만,

그 배경에는 30년 전쟁과 같은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있습니다.

30년 전쟁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유럽 전역을 휩쓴 종교적, 정치적 갈등의 시기였습니다.

이 전쟁은 유럽의 왕조와 국가들의 권력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켰고,

그 결과로 오늘날의 윈저 왕조가 형성되는 데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와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위를 오랜 기간 동안 차지했던 명문 가문입니다.

이들은 돈을 사용해 황제 자리를 사실상 사들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그 영향력이 컸습니다.

카를 5세를 마지막으로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의 아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을 차지했고, 동생 페르디난트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을 차지했습니다.

대항해 시대와 식민지 경쟁

이 시기는 유럽 각국이 대항해 시대를 통해 부를 축적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에 식민지를 세우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경쟁은 유럽 내에서 정치적 갈등과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특히 종교 개혁으로 인해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루터와 칼뱅 같은 종교 개혁가들은 신교를 퍼뜨렸고, 유럽 각국은 종교적 갈등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전성기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기

동시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하여 유럽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 확장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까지 미쳤고, 이 지역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였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큰 위기를 불러일으켰고, 유럽의 정치적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이처럼 16세기와 17세기의 유럽은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각국의 왕조는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고,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의 유럽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루돌프 2세 황제 시절

1580년대에 신성로마제국은 루돌프 2세가 황제였습니다.

루돌프 2세는 카톨릭 신자로서 종교 갈등을 방치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는 전쟁에서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해,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의 인기를 더욱 떨어뜨렸죠.

신성로마제국의 정치 구조와 선제후들

신성로마제국은 7명의 선제후들이 황제를 선출하는 독특한 정치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선제후들은 각 지역의 최고 권력자들이었으며, 그중 4명은 카톨릭, 3명은 신교를 따랐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카톨릭의 수호자로서 그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쾰른 선제후와 만스펠트 백작가문의 딸

이 시기에 독일의 쾰른, 즉 현재의 라인란트 지역의 선제후는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만스펠트 백작가문의 딸을 사랑하게 됩니다.

문제는 만스펠트 가문이 신교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었죠.

당시 사회에서는 귀족의 결혼이 가문의 권력과 정치적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사랑은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만스펠트 가문은 딸과 결혼하려면 신교로 개종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쾰른 선제후는 실제로 신교로 개종해버렸고,

이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들 사이의 종교적 균형이 4카톨릭 3신교에서 4신교 3카톨릭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루돌프 2세의 대응과 반란

이러한 변화는 카톨릭의 수호자로서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루돌프 2세 황제는 이 결혼에 반대하며, 교황청을 통해 쾰른 선제후를 파문시켜버립니다.

그러나 쾰른 선제후는 다른 신교 선제후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종교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갈등 심화

30년 전쟁은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유럽 전역을 휩쓴 대규모 종교 전쟁으로,

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개인의 사랑과 종교적 신념이 충돌하면서 거대한 갈등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사람들의 선택과 행동이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갈등은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으며,

그 시대의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지역

율리히-클레베-베르크는 지금의 스위스 근처, 마르세유 북쪽, 제네바 남쪽에 위치했던 지역입니다.

이 지역은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라는 점에서 프랑스에게 매우 민감한 지역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제 하에 있는 것을 매우 꺼렸습니다.

영주와 세습 문제

이 지역의 영주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사망하자, 살리카 법에 따라 딸들은 영지를 상속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딸들은 모두 신교 영주들과 결혼한 상태였으며,

그 중 한 명은 신교 선제후와 결혼했습니다.

따라서, 이 선제후가 영지를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신교 선제후의 연합

프랑스는 카톨릭 국가였지만, 이 지역의 영지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닌 신교 선제후가 차지하는 것을 지지했습니다.

당시 루돌프 2세는 자신의 조카인 카톨릭 귀족에게 이 영지를 하사했습니다.

이는 카톨릭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지를 주는 것이며,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루돌프 2세의 인기를 더욱 떨어뜨렸습니다.

네덜란드의 반응

이 결정은 네덜란드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며,

네덜란드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자가 아무런 혈통적 관련이 없는 스페인 사람으로 교체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은 한 가족이었고,

율리히-클레베-베르크 지역은 네덜란드와 육지로 이어진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부르고뉴 공국의 역사적 배경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부르고뉴 공국의 일부였으며,

부르고뉴 공작 샤를 용담공의 딸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시집가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카페 왕조의 방계 왕족이었고,

이 가문은 율리히와 네덜란드 모두에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 속에서, 루돌프 2세의 결정은 프랑스와 네덜란드 모두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종교적, 정치적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고,

30년 전쟁의 서막을 여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유럽의 역사가 매우 혼란스러웠고, 각국의 정치적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앙리 4세와 그의 암살

프랑스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왕은 부르봉 왕조의 시조인 앙리 4세였어요.

앙리 4세는 루돌프 2세의 정책에 트집을 잡으며 전쟁을 준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앙리 4세의 암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그 이야기는 서프라이즈 같은 프로그램에 맡겨두기로 합시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의 군사 동원 계획은 중단되었습니다.

바이에른 공국과 도나우베르트

신성로마제국 내의 바이에른 공국은 카톨릭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도나우강을 끼고 있는 도나우베르트라는 신교를 믿는 지역이 있었어요.

도나우베르트는 자유시로서 영주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자유시란 영주가 없는 대신 지역 주교가 관리하는 곳인데,

이곳의 주민들이 점점 신교로 개종하면서 카톨릭 교회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찬송가 사건

카톨릭 교회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성당의 신도들,

특히 성가대원들을 모아 광장에서 찬송가를 부르게 했습니다.

일종의 종교적 시위를 벌인 셈입니다.

하지만 이 행동은 신교도들을 자극하게 되었고,

결국 찬송가를 부르던 성가대원들이 신교도들의 돌을 맞아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시기에 종교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죠.

종교 갈등과 유럽의 혼란

이처럼 종교 갈등은 유럽 전역에서 극심했습니다.

카톨릭과 신교의 대립은 단순한 신앙의 차이를 넘어 정치적, 사회적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폭력과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도나우베르트에서 벌어진 사건은 그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 시기의 유럽은 정치적, 종교적 갈등이 극에 달한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왕들과 영주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종교를 이용했고, 이는 수많은 전쟁과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면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그 상황을 극복하려 했는지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루돌프 2세의 정치적 실책

루돌프 2세는 율리히 영주 임명 사건으로 인해 인기가 추락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더해 도나우베르트 사건이 발생하자, 신교도들의 무식하고 야만적인 행위로 몰아붙이며 카톨릭 수호자임을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시를 바이에른 공국의 카톨릭 영주에게 넘겨버렸습니다.

이는 신교도가 많은 자유시를 카톨릭 지역으로 포함시킨 것이라 신교도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루돌프 2세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약화시켰습니다.

종교전쟁의 위기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신성로마제국은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전쟁 직전의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내부 혼란도 가중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전쟁은 루돌프 2세의 동생인 마티아스가 총사령관으로서 맡고 있었습니다.

마티아스는 나름대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좋은 성과를 내며,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지역을 보헤미아 왕국으로 묶어 방어했습니다.

루돌프 2세의 사망과 왕위 계승 문제

루돌프 2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유럽에서 왕위 계승 문제는 항상 큰 정치적 문제로 발전했으며, 루돌프 2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마티아스가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마티아스 역시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은 왕위 계승 문제로 다시 한 번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방계 출신의 황제와 정치적 혼란

결국 마티아스가 사망하자, 신성로마제국은 방계에서 황제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방계 출신의 황제는 권위가 부족하여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신성로마제국의 정치적 안정성을 더욱 위태롭게 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운명

신성로마제국은 루돌프 2세의 정치적 실책과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점점 더 큰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능력 있는 리더십이 부족한 상황에서, 신성로마제국은 점점 더 약화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신성로마제국이 이후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를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신성로마제국의 역사 속에서 개인의 선택과 정치적 결정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갈등은 오늘날에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으며,

이러한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롭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카톨릭의 자성 운동: 잉골슈타트와 예수회

이 시기 유럽에서는 카톨릭 국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신교가 급성장한 이유를 카톨릭의 부패와 나태로 돌리며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자성 운동은 카톨릭의 기강을 되찾기 위해 영적인 재무장을 강조하는 카톨릭 근본주의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운동의 결과, 카톨릭 내에서 열성적인 전사들을 양성하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잉골슈타트라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잉골슈타트는 이 운동의 상징적인 장소로, 카톨릭 근본주의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회와 카톨릭 근본주의

이 시기에 예수회가 탄생했습니다.

예수회는 카톨릭 내에서 영적 무장을 강조하는 단체로,

교육과 선교를 통해 카톨릭 신앙을 수호하고 전파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서강대학교도 예수회 재단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예수회는 카톨릭 근본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활동하며, 카톨릭의 재건과 신교에 대한 저항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마티아스의 후계자와 신성로마제국의 운명

마티아스 황제가 죽은 후, 신성로마제국은 새로운 황제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황제는 잉골슈타트 출신으로, 카톨릭 근본주의 운동에 깊이 연루된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황제가 신성로마제국의 지도자가 되면서, 제국의 미래는 더욱 불확실해졌습니다.

카톨릭 근본주의에 의해 신교도들과의 갈등은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보헤미아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여기서 보헤미아 지역에 대해 알아두면 좋습니다.

보헤미아는 현재의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를 포함한 지역으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노래로 친숙한 보헤미안이라는 단어는 이 지역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려면 보헤미아 왕국의 왕위를 계승해야 했습니다.

이는 보헤미아가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선제후 자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통으로, 보헤미아 왕국의 왕이 되는 것은 황제로 가는 중요한 단계였습니다.

이는 현재 영국에서 왕이 되려면 웨일즈 대공이 되어야 하는 전통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얀 후스와 종교개혁의 기초

얀 후스는 종교개혁의 아버지로 불리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에 활동하며 유럽 대륙에 종교개혁 사상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얀 후스의 사상은 이후 마르틴 루터와 존 칼뱅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그들의 종교개혁 운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루터파와 칼뱅파 모두 얀 후스의 사상에서 많은 부분을 이어받았습니다.

얀 지슈카와 보헤미아의 독립 운동

얀 지슈카는 귀족 출신의 용병대장이며, 얀 후스의 사상에 깊이 감화된 인물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얀 후스의 몽둥이"라고 부르며 얀 후스의 종교개혁 운동을 무력으로 지원했습니다.

얀 지슈카는 체코 독립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체코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보헤미아의 종교적 자부심과 갈등

보헤미아는 신성로마제국의 중요한 지역으로, 오스만 제국과의 최전선에서 싸우던 곳입니다.

보헤미아 사람들은 종교개혁의 시작을 자신들의 지역에서 이룬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카톨릭 원리주의 교육을 받은 방계 출신으로, 권위가 약한 페르디난트 2세였습니다.

페르디난트 2세와 보헤미아의 반발

페르디난트 2세는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신하들이 카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는 보헤미아 귀족들과 주민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던 보헤미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강력히 저항했습니다.

2차 프라하 투척사건

이 저항의 결과로 발생한 사건이 바로 2차 프라하 투척사건입니다.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페르디난트 2세의 신하들을 의회 창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이는 보헤미아의 종교적 자유를 지키기 위한 극단적인 행동이었으며,

이미 얀 후스 시기에 1차 프라하 투척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2차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30년 전쟁의 서막

이러한 사건들은 결국 30년 전쟁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보헤미아의 종교적 자부심과 카톨릭 원리주의 간의 갈등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종교적, 정치적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30년 전쟁은 유럽 역사상 가장 긴 전쟁 중 하나로, 종교와 정치가 얽힌 복잡한 갈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보헤미아의 반란과 프리드리히 4세

보헤미아의 귀족들이 페르디난트 2세의 신하들을 창문 밖으로 던지는 2차 프라하 투척사건 이후,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저항을 넘어서 반란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보헤미아의 반란자들은 황제를 쫓아내고 새로운 국왕을 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너무 심했다고 깨닫고,

보헤미아 왕국이 반란자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신교 선제후인 팔츠 지역의 프리드리히 4세에게 왕위를 제안했습니다.

프리드리히 4세의 결단

프리드리히 4세는 신교도로, 바이에른에서 신교 자유시를 빼앗긴 것에 대해 큰 분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헤미아의 제안은 그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그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비록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닌데도 보헤미아 왕이 되는 것이 무리였지만,

그는 신교도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이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이는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영국과의 연대: 프리드리히 4세와 제임스 1세의 딸

프리드리히 4세의 아내는 영국 왕 제임스 1세의 딸이었습니다.

이 결혼은 영국과 팔츠 선제후국 간의 강력한 연대를 의미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하노버 왕조의 시기로, 하노버 왕조는 팔츠 선제후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4세의 후손이 영국 왕조를 이을 수 있었던 것이죠.

이후 하노버 왕조는 윈저 왕조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독일과의 콩가루 국가 상황

이 시기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복잡한 정치 구조와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웠습니다.

각 지역의 선제후와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서로 싸우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독일을 더욱 분열시켰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서 프리드리히 4세의 반란 가담은 더욱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프리드리히 4세가 보헤미아 왕국의 왕위를 수락하면서, 신성로마제국 내의 종교적, 정치적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이는 결국 30년 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30년 전쟁은 유럽 전역에 걸친 긴 전쟁으로,

종교적 갈등이 정치적, 군사적 갈등으로 번지면서 수많은 희생을 초래했습니다.

30년 전쟁 : 유럽의 삼국지

30년 전쟁은 단순히 많은 나라가 참여한 것만으로도 세계 최초의 세계대전 성격을 띄지만,

그 원인과 전개 과정을 보면 그 복잡성과 광범위함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이 전쟁은 유럽 전역을 휩쓸었고, 종교적 갈등이 정치적 갈등으로 번져갔습니다.

팔츠 선제후의 보헤미아 왕위 수락

프리드리히 4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왕위를 수락하고 보헤미아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신성로마제국의 카톨릭 선제후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프리드리히 4세가 팔츠와 보헤미아 두 지역의 선제후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카톨릭 선제후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선제후 회의와 황제 선출

프리드리히 4세가 보헤미아로 이동하는 동안, 카톨릭 선제후들은 선제후 회의를 소집하여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기로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4세는 직접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대리인을 통해 투표에 참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 선제후들은 대리인의 투표권 자격을 박탈하고, 페르디난트 2세를 다시 황제로 선출했습니다.

투표 결과는 3:2로, 2표가 기권 처리되었습니다.

페르디난트 2세의 황제 복귀와 전쟁의 시작

페르디난트 2세가 다시 황제가 되자마자, 프리드리히 4세를 반역자로 지정하고 그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이 전쟁이 바로 30년 전쟁의 시작이자, 보헤미아-팔츠 전쟁으로 불립니다.

30년 전쟁은 1618년에 시작되어 1648년까지 이어졌으며, 유럽 전역을 휩쓸며 많은 희생과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전쟁의 전개와 그 영향

보헤미아-팔츠 전쟁은 신성로마제국 내의 종교적, 정치적 갈등을 극대화시켰고,

유럽의 다른 국가들도 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스웨덴, 프랑스, 덴마크, 스페인 등 여러 나라들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국제적인 규모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단순히 군사적 충돌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동맹과 배신, 종교적 갈등이 얽혀 복잡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총 3편에 걸쳐서 할 예정입니다!

제가 읽어도 글이 좀 딱딱하고 역사책 느낌의 너무 설명조여서 무미건조한데

계속 뭔가 하다보면 잘 되지 않을까? 하고 있어요.

그래도 이전글의 일본 전국시대 이야기보다는 보고서 느낌이 줄고 역사책 느낌이 된건 좀 이상하지만

언젠가는 이야기 듣듯이 술술 읽히는 글이 되게

GPT 녀석에게 채찍질 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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