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유럽의 삼국지 : 독일 30년전쟁2(용병왕과 북방의사자 그리고 루즈재상 리슐리외)

2024. 7. 23.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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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군사 동원과 귀족들의 역할

보헤미아-팔츠 전쟁, 즉 30년 전쟁은 단순히 종교적 갈등뿐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동기가 뒤섞인 복잡한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전쟁을 치르기 위해 왕들은 자신의 군대뿐만 아니라 귀족들에게서 군대를 끌어와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귀족들의 힘과 지원이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4세의 황제 등극과 귀족들의 동원

프리드리히 4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닌 팔츠 선제후로서 보헤미아의 왕위를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는 정치적 지지 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카톨릭 선제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특히 바이에른 선제후에게 팔츠 땅을 주겠다는 제안으로 그의 지원을 얻어냈습니다.

이로써 황제와 바이에른 군이 연합하여 보헤미아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보헤미아의 고립과 도움 요청

보헤미아 왕국은 주변 신교 선제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대부분의 신교 선제후들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이는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라 정치적 계산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항상 경제적, 정치적 이유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종교는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사용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30년 전쟁은 종교전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이유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종교는 전쟁을 촉발시키는 명분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각국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권력이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각 나라와 귀족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전쟁에 참여했으며, 이는 전쟁의 성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보이 공국과의 연대

프리드리히 4세는 보헤미아에서 고립된 상황에서 사보이 공국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사보이 공국은 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강국으로, 당시 유럽의 정치적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보이 공국의 참여는 보헤미아에 큰 힘이 되었으나,

여러 정치적 이유와 복잡한 상황 때문에 쉽게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사보이 공국과 만스펠트 용병대

사보이 공국은 작은 나라였지만, 유럽 최강의 용병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용병대를 이끈 사람은 '용병왕'으로 불린 만스펠트였습니다.

신교도인 프리드리히 4세는 만스펠트의 용병대를 고용하여 전쟁에 참여하게 했습니다.

초기 전황과 보헤미아의 패배

만스펠트는 전황을 분석해 보헤미아가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했습니다.

팔츠와 보헤미아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었고, 황제와 바이에른은 똘똘 뭉쳐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만스펠트는 병력을 철수시켰고, 보헤미아와 신교도군은 황제군에게 대패했습니다.

프리드리히 4세는 네덜란드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황제의 선제후 임명과 다른 선제후들의 반발

황제는 보헤미아와 팔츠의 선제후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주려 했습니다. 이는 다른 선제후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루돌프 황제도 그러더니 너(페르디난트 2세)도 마음대로 선제후 자리를 막 주냐?"라는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때 만스펠트는 프리드리히 4세에게 다시 찾아가 자신을 고용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프리드리히 4세는 처음에는 화를 냈습니다. "뭘 믿고 너희를 고용하냐? 그때도 도망갔으면서."

하지만 만스펠트는 설득했습니다.

만스펠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그때는 싸워봐야 지는 게 명확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당시에는 힘을 하나로 모은 황제군을 보헤미아에서 정면으로 막아야 해서 불리했다.

그러나 지금은 황제가 힘을 한곳으로 집중시키지 못한다.

다른 제후들도 황제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황제군의 공격 지점이 분산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도 승산이 있다.!"

프리드리히 4세의 결정

프리드리히 4세는 만스펠트의 설명에 혹하게 됩니다.

"팔츠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만스펠트를 다시 고용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만스펠트는 다시 용병대의 지휘를 맡게 되고, 전쟁의 판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30년 전쟁의 확산

프리드리히 4세와 만스펠트의 재결합은 30년 전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종교적 갈등뿐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이 전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단순한 종교전쟁이 아니라, 각국의 권력 다툼과 경제적 이익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렇게 30년 전쟁은 유럽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종교와 정치, 경제가 복잡하게 얽힌 시대의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카톨릭화 선언과 본격적인 전쟁

페르디난트 2세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자신감을 얻고 자신을 도운 신교 선제후들을 무시하고

신성로마제국을 카톨릭 국가로 선언했습니다.

이는 신교 선제후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신교 연합과 카톨릭 연합 간의 대결이 본격화된 것입니다.

발렌슈타인의 등장

전쟁의 중심에 발렌슈타인이라는 보헤미아 귀족 출신의 용병대장이 등장합니다.

발렌슈타인은 탁월한 군사적 능력과 매력적인 외모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용병왕 만스펠트와의 전투에서도 승리했으며, 그의 인기는 매우 높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만화 '베르세르크'에 나오는 매의 단의 리더 그리피스와 닮아 있다고 여겨질 정도로 흥미진진합니다.

발렌슈타인의 군사 전략

발렌슈타인은 뛰어난 전략가로, 그의 군대는 매우 강력했습니다.

그는 카톨릭 연합의 중요한 인물로서, 신교 연합에 맞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의 전술과 전략은 당대의 다른 용병대장들과 차별화되는 점이 많았고, 이는 전쟁의 판도를 크게 좌우했습니다.

전쟁의 확대

페르디난트 2세의 카톨릭화 선언과 덴마크의 참전, 그리고 발렌슈타인의 활약은 30년 전쟁을 더욱 확대시켰습니다.

이 전쟁은 이제 단순한 종교 전쟁을 넘어서,

유럽 각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대규모 전쟁으로 발전했습니다.

2차 전쟁 : 덴마크의 참전

이 와중에 덴마크가 독일의 혼란을 틈타 전쟁에 개입하게 됩니다.

덴마크는 신교를 억압하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영토 확장의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독일 내의 상황이 혼란스러운 만큼, 덴마크는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의 땅을 넓히려 했습니다.

만스펠트와 발렌슈타인의 대결

30년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만스펠트와 발렌슈타인의 대결은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당시 만스펠트는 유럽 최고의 용병왕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반면 발렌슈타인은 잘생긴 외모많은 귀족 여성 팬을 가진 귀족 출신의 신출내기 용병대장이었습니다.

많은 황제측 귀족들은 발렌슈타인을 단순히 인기만 많은 초짜로 여겼습니다.

전쟁의 전술 변화

당시의 전쟁은 총병이 앞에서 장전하고 일렬로 서서 한 발씩 쏘는 형태였습니다.

총병의 연사력은 부족했고 화력도 약했습니다.

총병을 보호하기 위해 보병이 방패와 창을 앞세워 전진하여 적의 총병대를 박살내는 것이 일반적인 전술이었습니다.

결국 전투는 보병과 기병의 근접전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발렌슈타인의 군대 편성은 처음에는 엉성해 보였습니다.

월등하게 많은 총병의 숫자 때문에 보병과 총병의 비율이 이상하게 보였고,

군사 전문가들은 그를 초짜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은 새로운 전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가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사용한 총병 위주의 전술을 개량하여 사용했습니다.

발렌슈타인의 혁신적인 전략

네덜란드는 보병을 숙련시킬 시간과 자금이 부족해 총병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전술을 개발했습니다.

발렌슈타인은 이를 발전시켜 총병 위주의 부대를 편성했습니다.

이러한 부대의 치명적인 약점은 화약이 많이 필요하고 유지비가 많이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발렌슈타인은 충분한 자금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전략은 총병의 화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적의 보병과 기병을 압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발렌슈타인의 자금력과 전쟁의 전환점

발렌슈타인은 왜 이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의 많은 여성 팬들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는 그리피스와 유사한 매력적인 인물로, 여성들의 지원을 받아 막대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여성 팬들은 그를 위해 아낌없이 지원했고,

이는 그의 군대를 유지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발렌슈타인의 총병 위주의 부대는 전장에서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그의 혁신적인 전술은 적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만스펠트와의 대결에서 그는 뛰어난 전략으로 승리하며, 그의 군사적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만스펠트의 패배와 죽음

만스펠트는 발렌슈타인에게 패배하고 루마니아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용병왕으로서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국 발렌슈타인의 혁신적인 전술과 자금력에 밀렸습니다.

발렌슈타인의 총병 위주의 부대 편성은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0년 전쟁의 2차 전쟁과 덴마크의 패배

페르디난트 2세는 30년 전쟁의 2차 전쟁에서 덴마크를 패배시키고,

독일 내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습니다.

덴마크는 전쟁에서 패배한 후, 배상금을 지불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페르디난트는 이 기회를 이용해 구교와 신교 간의 평화 협정을 추진했습니다.

 

경제적 파탄과 조선의 임진왜란 비교

임진왜란은 8년에 걸쳐 조선의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행정력과 경제력이 강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전쟁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신성로마제국도 마찬가지로 15년간의 내전으로 인해 경제적 파탄을 맞았습니다.

중앙 집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독일은 각 지역의 경제 기반이 약해졌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부재

30년 전쟁 동안 신성로마제국이 운이 좋았던 점은, 오스만 제국이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의 세르비아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 큰 문제가 발생하여 신성로마제국에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또한 베네치아와의 문제도 터지면서 오스만 제국의 주의가 다른 곳에 집중되었습니다.

상처뿐인 승리와 임진왜란과의 비교

신성로마제국은 30년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는 상처뿐인 승리였습니다.

경제적 파탄과 내부 혼란으로 인해 신성로마제국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는 조선의 임진왜란과도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전쟁은 승리와 패배를 떠나, 참전 국가들의 경제와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조총병은 보조 역할이었으며, 주력은 기병이나 보병이었습니다.

일본군의 초기 승리는 조총의 신기함 때문이 아니라, 일본군의 수적 우세와 전쟁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전국시대가 막 끝난 상황이었고, 숙련된 병사들이 많았습니다.

반면 조선은 오랜 평화로 인해 숙련된 병사가 부족했습니다.

초기에 조선군은 일본군의 숙련도와 수적 우세에 밀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명나라군의 지원과 함께 조선군도 전쟁 경험을 쌓으며 숙련되어 갔습니다.

이순신 장군 외에도 권율 장군 등 조선의 육군도 일본군과 대등하게 싸웠습니다.

일본은 80년간 전국시대를 거치며 전쟁의 귀신들을 뽑아냈지만,

조선은 8년 동안의 임진왜란을 통해 충분히 전투 경험을 쌓았습니다.

리슐리외 재상의 방해 전략 : 3차 스웨덴 전쟁의 시작

프랑스의 리슐리외 재상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독일 통일 시도를 저지하려 했습니다.

프랑스는 독일이 통일되면 강력한 국가가 되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리슐리외는 매우 교묘한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프랑스군을 직접 투입하지 않고,

덴마크, 스웨덴등 다른 국가들과 독일 내의 신교 영주들을 부추기고 이간질하여 전쟁을 지속시켰습니다.

30년 전쟁의 진실: 종교전쟁과 독일 통일 전쟁

30년 전쟁은 종교전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이면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독일 통일 시도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독일을 하나로 통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통일 시도는 프랑스의 강력한 방해에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같은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은 서로 적이 되어 전쟁을 했습니다.

스웨덴과 독일 내 영주들의 역할

리슐리외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독일 내 신교 영주들에게 군사적 지원과 자금을 제공하여,

그들이 합스부르크 왕가에 맞서 싸우도록 했습니다.

스웨덴군과 독일 내의 신교 군대는 리슐리외의 지원을 받아 황제군과 싸웠고,

이는 독일의 통일 시도를 저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고도의 외교전쟁

이제 30년 전쟁은 단순한 종교전쟁이 아니라, 고도의 외교전쟁이기도 했습니다.

리슐리외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여러 국가와 영주들을 조종하고,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갔습니다.

프랑스는 자신들의 군대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도, 독일 내의 갈등을 조장하여 전쟁을 지속시킬 수 있었습니다.

전쟁의 결과와 독일의 분열

30년 전쟁의 결과로 독일은 더욱 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독일 통일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독일은 수많은 작은 공국과 영주들이 난립하는 상태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독일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유럽의 외교력과 봉건사회의 오랜 역사적 배경을 보면, 그들의 외교 기술은 뛰어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봉건사회가 오래 지속된 문화권에서는 외교력이 발달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일, 일본,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이 외교를 잘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봉건사회의 역사와 외교력

봉건사회가 오래 지속된 국가들은 중앙집권화가 늦게 이루어졌고,

이는 지방 세력들이 독립적으로 외교 활동을 활발히 해야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쌓이면서 외교력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독일과 일본의 경우, 중앙집권화가 19세기 말에 이루어졌고, 이는 외교력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외교력의 중요성

외교력은 국가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유엔 사무총장 같은 자리는 상징적일 수 있지만, 진정한 외교력은 국가 간의 협상과 전략적 동맹에서 발휘됩니다.

독일과 일본은 이러한 외교적 능력을 바탕으로 전후 경제 회복과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강대국이 유엔 사무총장 같은 자리에 오르지 않는 이유는,

내부적인 견제를 피하고 보다 효과적인 외교 전략을 구사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아우구스부르크 화의 이전으로의 회귀 시도

페르디난트 2세는 독일 내에서 구교와 신교 간의 화해 무드를 조성하기 위해

"아우구스부르크 화의" 이전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아우구스부르크 화의(1555)는 종교 자유를 보장하며,

구교 신자는 구교 지역에, 신교 신자는 신교 지역에 머물도록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2세의 제안은 신교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왜냐하면 신교도들은 전국 각지에 퍼져서 이룬 재산을 구교 지역에 놓고 신교 영지에 가둬놓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교 영주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결정은 30년 전쟁의 지속과 함께 돌이킬 수 없는 혼란으로 독일을 몰아넣었습니다.

페르디난트 2세의 정치적 실책

페르디난트 2세는 무력으로 평화를 가져왔지만, 그의 정치적 실책은 또 다른 싸움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권력자들이 종종 자신의 권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페르디난트 2세 역시 자신의 권력을 신성시하며 무리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페르디난트 2세의 시도는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중요하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줍니다.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면 갈등과 분열이 심화될 수 있습니다.

이는 과거와 현재 모두 중요한 문제로, 정교 분리는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프랑스의 독일 견제

프랑스는 30년 전쟁의 2차 전쟁 이후 독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독일이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해 통일될 조짐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통일되면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이 분명했으므로, 프랑스는 이를 견제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의 종교적 갈등

프랑스와 독일은 모두 카톨릭 국가였지만, 정치적 현실에서는 종교적 일치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정치적 이익이 종교적 신념보다 우선시되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는 독일 내 신교 세력의 불만을 감지하고 이를 이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발렌슈타인의 등장과 프랑스의 주목

프랑스는 또한 발렌슈타인의 영웅적인 활약을 주목했습니다.

발렌슈타인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카리스마로 독일 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프랑스에게는 큰 변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발렌슈타인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해 싸우고 있었지만,

프랑스는 그의 역할과 영향력을 주시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전략: 신교 세력과의 연대

프랑스는 독일 내 신교 세력의 불만을 이용하여 독일의 통일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프랑스는 신교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독일 내의 분열을 유도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 확대를 방해하려 했습니다.

이는 이순신 장군의 활약이 조선에서 큰 변화를 일으킨 것처럼,

발렌슈타인의 군사적 활약이 독일 내에서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전략이었습니다.

발렌슈타인의 영향력과 정치적 활용

발렌슈타인의 영향력은 독일 내에서 커졌지만, 그의 군사적 성공은 오히려 독일 내의 갈등을 증폭시킬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이를 이용하여 신교 세력을 부추기고, 독일 내에서 반발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프랑스는 직접적인 군사 개입보다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독일 내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발렌슈타인의 영지 요구와 귀족들의 반발

발렌슈타인은 페르디난트 2세에게 상업이 발달한 한자 동맹의 중심지인 슈트랄준트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페르디난트는 그의 요구를 수락하여 영지를 하사했지만, 이는 큰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원래 슈트랄준트의 영주가 있었기 때문에, 이 영주는 시골 영지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귀족들의 반발

슈트랄준트의 원래 영주뿐만 아니라 주변 귀족들도 발렌슈타인의 영지 하사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했습니다.

발렌슈타인은 보헤미아 출신의 시골 귀족으로, 그의 지위 상승은 기존 귀족들 사이에서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독일 내에서는 신교와 구교 간의 갈등이 이미 심각한 상황이었는데, 이제는 구교 내부에서도 불만이 생겨났습니다.

리슐리외의 전략적 접근

프랑스의 리슐리외 재상은 이러한 상황을 주목했습니다.

그는 독일 내의 분열을 이용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 확대를 막으려 했습니다.

리슐리외는 바이에른 선제후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이에른 선제후는 황제파 중에서도 충성도가 높은 인물이었지만, 리슐리외는 그에게 매력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바이에른 선제후의 요구와 반역의 여지

리슐리외는 바이에른 선제후에게 슈트랄준트를 원상복귀 시키는 대신,

페르디난트의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을 지지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바이에른 선제후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였고,

페르디난트에게 슈트랄준트를 원래 상태로 돌려놓으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권력 구조를 위협하는 반역적인 요구였습니다.

리슐리외는 바이에른 선제후에게 더 나아가,

독일의 황제 자리를 비텔스바흐 가문이 차지하도록 밀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대체하는 것으로, 진정한 반역 행위였습니다.

바이에른 선제후는 이 제안을 통해 큰 야망을 품게 되었고,

이는 독일 내의 정치적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비텔스바흐 가문과 마리아 테레지아

비텔스바흐 가문은 현재 독일에서도 재벌로 잘 살아가고 있는 가문입니다.

이 가문은 놀랍게도 한때 합스부르크 가문을 밀어내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매우 짧았고,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다시 쫓겨났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로, 살리카법 때문에 여성이 왕이 될 수 없어

알자스 로렌 공작과 결혼하여 남편을 황제로 만든 인물입니다.

리슐리외의 독일 이간질

프랑스의 리슐리외 재상은 독일이 통일되지 않도록 다양한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그의 주요 목적은 독일을 분열시켜 프랑스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리슐리외는 독일 내에서 정치적, 종교적 갈등을 부추기며 분열을 조장했습니다.

바이에른 선제후와의 연대

리슐리외는 바이에른 선제후에게 접근하여, 황제 자리를 비텔스바흐 가문이 차지하도록 지원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바이에른 선제후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페르디난트 2세의 아들이 황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슈트랄준트의 원상복귀를 요구했습니다.

이는 독일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구교와 신교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내정 문제와 통일의 어려움

리슐리외는 독일이 내정 문제로 인해 외교적, 종교적, 정치적으로 통일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독일 내의 갈등을 이용하여 프랑스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그의 계산은 정확했으며, 독일은 30년 전쟁을 통해 더욱 분열되었습니다.

페르디난트 2세와 3차 전쟁

페르디난트 2세는 신교도들에게 종교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를 따르지 않는 신교도들과 3차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의 또라이적인 행동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는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분열된 민심을 전쟁으로 덮으려 했습니다.

이슈를 다른 이슈로 덮는 방식은 현대 정치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스웨덴의 개입

리슐리외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2세를 끌어들여 독일 내 전쟁에 개입하게 했습니다.

스웨덴은 강력한 해상 민족인 바이킹의 후예로, 유럽 본토에 세력을 뻗고 싶어 했습니다.

스웨덴은 덴마크에 밀려 유럽 내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기 어려웠지만,

리슐리외의 제안을 받아들여 독일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구스타프 아돌프 2세와 스웨덴의 상륙

구스타프 아돌프 2세는 스웨덴의 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독일 전쟁에 참가했습니다.

그는 포메른에 상륙하여 페르디난트 2세의 군대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페르디난트 2세는 자국 내 신교도들과의 싸움뿐만 아니라, 스웨덴 왕과도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3차 30년전쟁 직전까지의 글을 정리했습니다.

이번에도 챗지피티를 사용해봤는데

조금 더 발전 했나? 싶으면서 여전히 중복된 내용을 하나로 합치는걸 잘 못하고

제가 말한 내용을 순서대로 정리만 할 뿐이더라구요.

제가 라이브 방송으로 이야기한데다 제가 아는 지식을 나열하면서 글을 썼다보니

중복되는 내용들(특히 리슐리외와 관련된 내용들, 그때 흑막이라고 엄청 강조하면서 리슐리외와 관련된 내용이 절반이 넘더라구요.)

을 똑같이 반복만 하길래

이번에는 그런 부분들은 삭제했는데 내용을 수정한 부분은 없습니다.

이번에는 더 많은 그림을 그려줄 것을 요구했는데

얼굴 표정이나 그림이 너무 해괴하다 싶은건 그림 답게 그릴때까지 열심히 갈궜(?)습니다.

그랬더니 챗지피티가 파업을 하고 내일 다시 오라고 하는바람에

2번째 글은 이제서야 올려봅니다.

다음 3번째 글에서 30년 전쟁은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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